있는 듯 없는 듯…빌 게이츠도 반한 달항아리

입력 2020-11-10 17:15   수정 2020-11-11 00:41


사람 키만 한 달항아리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회백색 바탕에 그린 순백의 달항아리가 그야말로 달덩이 같다. 캔버스 위의 달항아리는 크기부터 넉넉하다. 실제 달항아리 높이가 40~60㎝가량인 데 비해 그림 속 달항아리는 70~180㎝에 달한다. 중견작가 최영욱(56)의 달항아리가 실물보다 더 넉넉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그의 달항아리는 당당하다. 시선을 항아리의 배 아래로 낮춰 잡아서다. 시선을 낮춘 결과 달항아리가 소박하고 초라한 게 아니라 바닥 선이 더 잘 보이고 배 아래에 형성된 미세균열(빙열)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가 그린 달항아리의 매력은 크기에만 있지 않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볼 땐 크기가 압도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디테일에 놀라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자기 표면에 생기는 미세 균열은 ‘진짜 도자기인가’ 하고 눈을 의심할 정도다. 크고 작은 잡티와 변색 등 달항아리가 품고 있는 세월의 흔적과 상처까지 살려냈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11일 개막하는 최영욱 개인전에는 이런 달항아리 20여 점이 걸렸다.

13년째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는 최영욱은 해외에서도 잘 팔리는 인기 작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헬렌 J 갤러리에서 지난달 2일부터 열린 개인전에선 출품작 25점이 일찌감치 다 팔렸다. 전시 기간이 오는 27일까지라 7점을 추가로 보냈다고 한다. 최영욱은 2011년 빌 게이츠가 설립한 재단에서 그의 작품을 세 점이나 구입하면서 유명해졌고 SK그룹, 대한항공, 롯데호텔, 스페인·벨기에·룩셈부르크 왕실 등에서도 소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이토록 사랑받는 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넉넉하고 충만한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처럼 독특한 조형미는 구도행과도 같은 붓질에서 나온다. 그는 캔버스에 가볍게 드로잉한 다음 젯소에 백색 돌가루를 섞어 묽게 탄 뒤 도자기 형태로 칠해나간다. 칠이 마르면 사포로 갈아내고 다시 칠하기를 100여 차례. 그제야 화면에 2~3㎜의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젯소와 돌가루를 되직하게 타면 훨씬 수월하게 두께를 쌓을 수 있지만 마른 뒤 갈라지기 쉽다.

형태가 만들어진 후에는 달항아리에 세월의 흔적을 입히는 과정이 시작된다. 매끈한 도자기 표면에 생긴 빙열의 복잡다단한 선을 가는 붓과 연필로 그리는 작업이다. 전시를 앞두고 만난 최영욱은 “벽에 캔버스를 고정시켜 놓은 채 잡념을 없애고 좋은 것만 생각하면서 작업에 몰두한다”며 “돋보기를 끼고 100호 크기의 작품에 빙열을 완성하는 데 꼬박 나흘 정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면벽 수도나 다름없는 작업이다. 잡념이 없어야 꺾고 올리고 내리는 빙열의 선이 물 흐르듯 전개돼 자연스러워진다고 했다. 그가 작품의 제목을 모두 ‘카르마(KARMA)’라고 붙인 이유다. 불규칙하게 서로 연결된 선들이 업(業)의 연결고리를 닮았다.

최영욱의 달항아리는 극사실주의 작품 같지만 실물의 재현이 아니다. 상상으로 형태를 만들고 빙열을 그린다. 그는 “처음에는 잘 그렸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사실적으로 드러내려고 욕심을 냈지만 지금은 밋밋하게 있는 듯 없는 듯해야 질리지 않고 더 좋다”며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있는 듯 없는 듯한 형태 속으로 빨려든다”며 “그것은 텅 빈 그릇이면서 동시에 꽉 찬 존재”라고 평했다. 전시는 25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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